

☆ 긍정적인 사람 ☆
태양이 작열하는 아프리카에 같은 목적을 가진
두 회사원이 거의 같은 때에 도착했다.
저들은 신발을 수출하는 회사의 직원들이었다.
한 사람은 미국에서 출장을 나왔고,
다른 사람은 영국에서 출장을 오게 되었다.
그곳 사람들은 모두가 아직도 맨발로 다니고 있었다.
영국에서 출장 나온 사원은
즉시 본사에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전문을 보내면서
물품 보내는 것을 중지하라고 통보했다.
"이곳에 와 보니까 사람들이 모두 맨발로 다니기 때문에
신발에 대한 수요가 전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출장 나온 사원의 견해는 이와 정반대였다.
그는 본사에 자신만만한 태도로 긍정적인 보고를 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아직 아무도 신발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발을 팔 수 있는 시장성이 무한정입니다.
그러니 물품들을 속히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똑같은 상황을 놓고서 그것을 파악하는 이의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견해를 보여 주었다.
긍정적인 말을 했던 사람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구태여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도
긍정적인 말을 했던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외에 부정적인 말을 했던 사람들은
40년의 광야생활 도중에 다 죽고 말았다.
그들의 운명은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한 대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지 못하고
부정적인 상황을 파악한 그들에게는
가나안 땅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하는 말대로, 품은 생각대로 변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 긍정의 힘이 있는 것이다.
그릇된 생각을 하면 그릇된 쪽으로 흘러간다.
'불행하다, 절망적이다.'라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우리의 삶도 그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행복하다, 즐겁다, 희망적이다'라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바로 우리의 삶도 긍정적인 쪽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결단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할 수 있습니다."
I can do it! Because GOD is with me!
"나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창 28:13-15)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깥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니 아니하리리 하신지라
(창 28:18-22)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가는 이 길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꼐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행 15: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고후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렘 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은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아멘!
I can do it! Because GOD is with me!
"나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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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사람을 성공으로 이끄는 신앙이다. 희망없이는 어떠한 일도 이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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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 do it! Because GOD is with me!
"나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 참된 교육 ☆
사회의 시선은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람이 부와 명성을 얻기 위해 애쓰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런 관심들이 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결과가 인생의 본질적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다.
과정이 생략된 채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성장 과정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교육은 바로 성장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해 좋은 인생의 열매를 맺게 한다.
자녀가 집을 나설 때 한국의 부모들은 "애야, 누구한테 지면 안돼"라고 당부한다.
반면 일본의 부모들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고 하고,
미국의 부모들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돼라"고 말한다고 한다.
교육은 지식전달이 아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가르치는 도구다.
유대인은 어려서부터 "나 없는 하나님은 있어도 하나님 없는 나는 없다.
나는 하나님의 도구다"라고 배운다고 한다.
☆ 거울 자아이론 ☆
사회학 이론 중에 '거울 자아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게 따라
그대로 되어진다는 이론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내 자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별 볼일 없는 놈, 한심한 놈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는가?
정말 내가 낳은 자식이지만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바로 자녀다.
권고와 꾸중과 잔소리로 바뀌지 않는 것이 바로 자녀이다.
현실적으로 자녀의 상황은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다.
하지만 자녀를 대하는 태도만은 바꿀 수 있다.
하나님의 눈으로, 믿음의 눈으로 자녀를 바라보자.
지금은 한심하고, 별 볼일 없어 보여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면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쓰임 받게 될 것이다. 아멘!
I can do it! Because GOD is with me!
"나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벧후 2:14)
...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 ...
(잠 7:8,10,21,22)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 집으로 들어가는데,,,
그 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계집이 그를 맞으니..
여러가지 고운 말로 혹하게 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소년이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메이려 가는 것과 일반이라
(엡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버리고
(마 13:22)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부자 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내일 할 일을 오늘하고 오늘 먹을 것을 내일 먹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I can do it! Because GOD is with me!
"나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 미안합니다 어머니 ♡
나이가 들어가면서 병아리 눈물만큼 철이 드는가.
병상에 누워 아무 것도 하지 못하시는 어머니, 미안합니다.
입맛에 맞는 맛있는 것 먹다 말고, 먹지 못하시는 어머니, 미안합니다.
편한 잠자리 이불 덥고 자다 말고 문득, 누구에겐가 들킨 것처럼 어머니, 미안합니다.
좋은 옷, 치장하고 폼 잡고 나서 어쩐지 미안합니다. 입지 못하는 어머니
입을 크게 벌리고 웃다가도 문득 말 못하시는 어머니, 미안합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 옆을 지나다가, 나 혼자 건강한 것 미안합니다.
싱싱한 깍두기 김치 어석어석 씹다가도, 씹지도 못하는 어머니, 미안합니다.
TV 볼륨 크게 켜고 볼 때, 듣지 못하는 어머니, 미안합니다.
하늘 푸르고 산이 싱그럽고 꽃들이 필 때, 혼자 보는 것 미안합니다.
세상 천지간 지금까지 누려온 모든 것이, 누구의 은혜인가?
너무도 분이 넘쳐 미안합니다. 어머니 미안합니다.
※ 할아버지 소원 ※
60세 부부가 생일잔치를 하고서 천사에게 소원을 말했다.
부인은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하는 것이라 했다.
잠시 후 세계일주 비행기 표가 날라 왔다.
남편도 소원을 말했다.
"지금 마누라보다 30세 젊은 부인을 주세요"말했다.
천사는 '참 어려운 소원인데...'하더니 남편이 90세 노인으로 변해 버렸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다.
지금의 아내와 남편으로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를 만나도 행복할 수 없다. 아멘!
I can do it! Because GOD is with me!
"나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벧후 2:14)
...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 ...
(잠 7:8,10,21,22)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 집으로 들어가는데,,,
그 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계집이 그를 맞으니..
여러가지 고운 말로 혹하게 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소년이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메이려 가는 것과 일반이라
(엡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버리고
(마 13:22)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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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내일 할 일을 오늘하고 오늘 먹을 것을 내일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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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 do it! Because GOD is with me!
"나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 너에게 묻는다 ☆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시인 안도현씨(1961 경북예천)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짤막한 시이다.
과연 우리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단 한번이라도 따뜻해본 적이 있었는가?
이 시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하며 새로운 다짐을 유도하고 있다.
안도현 시인의 그림책 「관계」는 발로 차지 말아야 할 것은
연탄재만이 아닌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어느 가을날 갈참나무에서 도토리 하나가 땅에 떨어졌다.
도토리는 어둡고 캄캄한 땅이 무서워 울고 싶어졌다.
이 때 바로 옆에서 도토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도토리야 걱정하지마. 지금부터 우리가 너를 지켜줄게."
여름까지 함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이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더니 도토리보다 먼저 땅에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낙엽들은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둘러싸고 포근히 껴안아 사나운 비바람을 막아주었다.
도토리는 낙엽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딱딱한 껍질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낙엽은 그러한 도토리를 위로했다.
"넌 이미 우리를 위해 큰일을 하고 있어.
네가 끝까지 살아남아야 우리가 다시 만나 새로운 관계를 맺는 거지.
그게 우리의 꿈이야."
겨울이 되고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도토리는 낙엽의 품에 안긴 채 긴 잠에 빠져들었다.
이듬해 봄 도토리가 눈을 떴을 때 낙엽은 썩어 있었다.
가루가 돼 버린 낙엽들 속에서 도토리의 몸은 단단한 껍데기가 찢어지며 파란 싹이 돋아났다.
낙엽의 말을 이해하게 된 도토리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낙엽의 뜨거운 사랑은 도토리에게 새 생명을 주었다.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예수 피, 새 생명을 주셨다.
뜨거운 사랑으로 보답하는 삶을 살자.
I can do it! Because GOD is with me!
"나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나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행 24:16)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아멘!
I can do it! Because GOD is with me!
"나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 소 대신 예배 ☆
몽골의 이용규 선교사님의 '내려놓음'이라는 책에
"소 대신 예배를 택하는 마음"이라는 글이 있다.
선교사님이 몽골의 베르흐 지역 예배처소를 방문해 예배를 드리는 중에,
빌러르라는 자매가 예배시간에 땀으로 뒤범벅이 돼 교회에 들어왔다.
그 자매는 몇 달 전에 기도를 통해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린 자매였다.
그런데 그 날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려서
소를 찾으러 뛰어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고,
소를 버려두고 말씀을 들으려고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왔다는 것이다.
그때 선교사님은 자신의 재산 보물1호인 소를 버려두고
예배를 선택한 이 자매의 믿음의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자마자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잃었던 소가 집이 아닌 예배 처소를 찾아온 것이다.
소가 아닌 하나님께 예배를 선택한 이 자매는
예배와 소, 두 가지를 함께 얻었다.
그렇다. 예배가 우선이다.
우리는 삶에서 예배가 회복될 때 하나님은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키신다. 아멘!
☆ 성경 속의 수표 ☆
어느 믿음좋은 가정에 일류대학에 입학한 아들이 있었다.
아들은 기념으로 자동차를 사달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성경책을 선물하며 성경을 읽으면 응답이 올 거라고 했다.
1학기가 끝나고 기숙사에서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다시 차를 사달라고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성경을 읽었냐고 물었다.
아들은 "예"라고 대답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아버지는 다시 아들을 불러 성경을 읽었냐고 물었다.
아들은 억울하다는 듯이 더 큰 소리로 "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선물했던 성경책을 펼쳤다.
그 안에는 차를 살 수 있는 수표가 들어있었다.
아버지는 부정직한 아들을 크게 혼냈고 그 아들은 대학 4년 동안 차를 가질 수 없었다.
세상은 학벌을 최고로 친다. 그러나 성품이 뒷받침되지 않는 지식은 헛것이다.
다윗은 (시 51:10) "하나님이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셔"
라고 기도했다. 진정한 힘은 정직에서 나온다. 아멘!
I can do it! Because GOD is with me!
"나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요 16:9-11)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시 49:12)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고전 12:3)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8:2)
이는 그리스도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단 12:3)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아멘!
I can do it! Because GOD is with me!
"나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 때늦은 후회 ☆
청개구리는 어머니 살아생전 너무나도 속을 썩였다.
동으로 가라 하면 서로 가고, 서로 가라 하면 동으로 갔다.
냇가로 가라 하면 산으로 가고, 산으로 가라 하면 냇가로 갔다.
어머니가 시키는 것은 반대로만 했다.
근심 속에 살던 어머니 청개구리는 유언을 남기며 죽었는데,
무덤을 냇가에 쓰라고 했다.
어머니가 죽고 나자 아들 청개구리는 정신을 차렸다.
어머니의 유언만큼은 꼭 지켜야겠다면서
무덤을 냇가에 썼지만 그것마져 어머니의 본뜻과는 다르게 되고 말았다.
청개구리는 비만 오면 운다.
어머니 무덤이 떠내려 갈까봐 걱정이 되어 운다.
"울 엄마, 울 엄마, 나 때문에 쏙만 썩은 울 엄마!"
청개구리는 오늘도 울고 있다.
주님 말씀대로 살기보다는 내 맘대로 살아가는 영적 청개구리들은 없는가요?
때늦은 후회 때문에 슬픔의 주인공이 되지 맙시다.
☆ 지금 행동(Action) 합시다 ☆
한 아이가 아버지의 급한 편지를 가지고 냇물 건너편 마을로 심부름을 가다가
흐르는 냇가에 앉아 하루 종일 물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는 노인이 물었다.
"무슨 일로 거기 앉아 물만 들여다보고 있느냐?"
"예, 저는 지금 아버지의 급한 편지를 가지고 건너 마을에 가는데
이 냇가에 물이 끊어진 뒤에 건너가려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얘야!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80평생 쉬지 않고 흐르는 물인데
언제 끊어질 때를 기다리겠느냐"
우리는 다 하나님 아버지의 급한 편지를 받아 든 전도사명자들이다.
믿지 않는 저 건너편 마을로 심부름을 가는 사명자들이다.
인생의 문제란 흐르는 물과 같아서 끊어질 날이 없다.
이런 일 저런 일 ... 새로운 일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가오는 법이다.
공연히 허송세월 보내지 말고 지금 당장 흐르는 냇물에 발을 담그자!
이웃에게 Action(행동) 하자!
I can do it! Because GOD is with me!
"나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롬 10: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행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I can do it! Because GOD is with me!
"나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장 31절 - 34절
“그 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우리가 진리라는 말을 많이 듣고 진리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진리라는 말은 참된 도리가 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참된 도리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진리에 접근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진리를 알면 그 결과로 자유함을 얻습니다.
진리라는 말을 조금 자세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논리의 법칙에 일치하는 일을 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만유인력의 법칙이 진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물체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이 변함없는 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한번 죽는다는 것도 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진리라는 것을 말하면 누구나 인정받아야 할 보편적인 타당한 지식을 진리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누구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진리를 깨닫지 않는 사람들도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는 변함없는 사실이요, 이러한 것을 진리라고, 진실이 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것이 진리라고 말하지 않고 세상에서 말하는 진리와는 전혀 다른 것을 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진리를 아무리 얻는다 하여도 진리로 인하여 얻어지는 자유함을 얻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8장 38절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예수님 당시에 최고의 권력가요 지성인인 빌라도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진리가 무엇인가하고 물었습니다.
예 수님은 이 빌라도의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진리는 세상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요, 오직 예수를 믿고 영접한 사람만이 예수님이 말씀하는 진리를 알게 되고, 이 진리를 앎으로 자유케 되는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의 개요는 영원히 변하지 않고 예외가 없는 것이 진리입니다.
창세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변함없이 그대로 있고, 장차 세상에서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
과학이 말하는 진리나 철학이 말하는 진리나 세상이 말하는 진리라는 것은 변하게 되고, 예외가 있는 것임으로 진리가 아닙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진리로 여겼지만 지금은 진리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외가 있어서 우주선을 타고 대기권을 벗어나면 사람이 둥둥 떠다니지 밑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인공위성도 한번 쏘아 올리면 떨어지지 않고 몇 십 년을 그대로 둥둥 떠다니고 있으니 만유인력의 법칙도 예외가 있음으로 진리가 아닙니다.
수학도 진리가 아닙니다. 점과 점 사이의 최단 거리는 직선거리이다. 라고 정의하고 이를 변함없는 진리라고 말하고 있지만 미국에서 서울을 가려면 직선거리로 가면 더 멀기 때문에 비행기가 연료를 절약하기 위하여 돌아가야만 더 빨리 갑니다.
사람이 한번 태어나면 죽는다는 것이 진리라고 말하고 있지만 예외가 있습니다.
엘리야와 에녹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나라에 올라갔고, 예수님은 죽은 후에 3일만에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진리는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는 다른 것임으로 변함이 있고, 예외가 있는 것임으로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를 알면 자유를 누리며 속박을 받지 않으며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성경은 진리를 네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진리입니다.
이사야 65장 16절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앞에 숨겨졌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고, 세상 끝난 후에도 영원히 계시는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진리의 하나님을 내가 아는 것은 바로 진리를 깨닫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심으로 온 우주와 이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시고, 보존하시고, 관리하시는 능치 못함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이시오, 죄와 함께 거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시오,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시며 죽게 하시고, 이를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주시고 구원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이시오,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이시오,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진리를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소개한 성경책을 열심히 읽고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호세아서 6장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힘써 알기를 노력하는 것은 그만큼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임을 알고, 하나님은 진리의 왕이시오, 진리 중의 진리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2.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진리입니다. 진리 되신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우리에게 나타나신 진리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진리 되신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진리의 하나님께 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심으로 진리가 되십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함을 받는 일은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이 동일합니다.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대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어 우리를 위하여 변함없이 간구하여 주시는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3. 성령님이 진리입니다.
요한 1서 5장 7절 “증거 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성경은 여러 곳에 성령님이 진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7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16장 13절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께서 나를 진리로 인도 할 때에 나에게는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자유함이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3장 17절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성령이 계시고, 성령이 역사 할 때에는 우리에게 자유함이 있는 것을 볼 때에 진리의 성령을 부인 할 수는 없습니다. 경험한 사람은 두말하지 않습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산상 보훈에도 천지는 없어지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하신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 영원토록 능력 있게 진리로 존재합니다.
이상의 네 가지가 나는 진리로 알고, 이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이 진리를 더 알기를 노력하며 살아가고, 이 진리를 앎으로 진리로 인하여 오는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삼위 일체 하나님이심으로 하나이고,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시니 이 또한 하나입니다.
이 하나에 속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이요, 진리를 안 결과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도 역시 진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1. 죄에서 자유합니다.
요한복음 8장 34절 - 36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우리 선조 아담이 죄를 지은 후로부터 모두 죄의 종이 되어 죄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종 이란 것은 자유가 없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일하여야 하고, 일을 하여도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 그저 먹고 입고 잠자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평생을 고생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종이요, 자식을 낳아도 자식도 종이 되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정하여 주는 곳에서 일하고 먹고 자야만 합니다.
죄의 종은 세상에 사는 동안 아무리 착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여도 자기의 것이 되지 못하고, 주인이 차지합니다.
자선 사업을 많이 하고 구제를 많이 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여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죄의 종 신분임으로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가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자유케 하면 종의 신분이 없어지고, 자유인이 되어서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자유인은 아무리 가난하고 못 생기고 가진 소유가 없어도, 자유가 있기 때문에, 일하면 일한 대가를 자기가 소유로 삼게 되고, 자기의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예수의 피를 의지하고, 자기의 죄와 허물을 인정하고, 예수께서, 진리 되신 주께서 내 대신 내 죄 값으로 죽으시고 그 죽음으로 죗값을 치르셨음을 알고 이를 믿는 사람은 죄의 종에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5절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진리의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 진리 되신 주의 명령, 진리 되신 성령님의 소원, 진리인 성경 말씀의 총체는 “예수를 믿으라” 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진리를 믿으면 종의 신분이 사라지고, 주님과 친구가 되는, 자유인의 신분으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 죄의 종으로 있는 사람이 아무리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여도 이 헌금이 하늘나라에 상급으로 싸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박 대통령 서울의 새문안 교회를 지을 때에 건축 헌금을 금일봉을 하였지만 이 것은 하늘의 상급과는 아무런 상급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 되신 예수를 믿는 자가 물 한 그릇을 선지자에게 대접하고, 과부의 두 렙돈과 같이 작은 돈이지만, 이를 하나님께 드릴 때에는 이것은 천국에서 상을 잃지 않고 보물로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재산은 은밀히 구제하고, 하나님께 바침으로 쌓여지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창고에 쌓이는 것이 나의 보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1000 딸라를 벌었을 때에 하나님께 10불을 헌금하고 990 딸라를 내가 가지고 사용하였다면 990 딸라는 하늘나라에 쌓이지 않고 하나님께 드린 10불만이 천국 창고에 쌓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가난하고 다른 사람만큼 잘 살지는 못하였지만, 천국에 가서는 영원토록 더 잘 살아가는 우리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를 깨닫고, 자유인으로 하나님 나라에 보물을 쌓는 일에 게으름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종과 자유인의 차이는 같은 일을 하였다 하여도 그 결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며 죽으심으로 나는 죄사함을 받았다고 믿는 사람, 죄에서 자유함을 받은 사람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과는 동일한 일을 하여도 그 결과는 다른 것입니다.
두 사람이 낚시를 가서 하루 종일 고기도 잡고 물놀이도 하며 즐기다가 돌아 왔을 때에 자유인은 형벌이 없지만, 종은 신분에 벗어난 일을 한 책임을 문책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인은 형벌에서 해방이 된 사람이지만, 종은 형벌에서 해방이 되지 못하고 항상 형벌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똑 같은 죄를 지어도 예수를 믿는 사람은 형벌이 없지만, 죄의 종으로 사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음으로 죄에서 자유함을 받았음을 알고, 우리는 진리로 나를 자유케 하여 주신 하나님께, 주님께, 성령님께 감사를 드리며,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며, 지키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종과 자유인은 책임이 다릅니다.
종은 주인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거기서 끝나고 책임이 없지만, 자유인은 자기가 행한 일의 결과를 책임져야 합니다.
우리 자유인에게 주신 책임은 진리를 전파할 책임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전파하여 다른 사람들도 이 진리를 믿고 받아들임으로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자유자가 되어 구원에 이르는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탈레반에게 납치되어 순교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였지만, 그래도 또 다시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이러한 자유함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이를 비방하고 모독하는 것은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자유자이지만 이 자유를 갖고 덕을 세우고 남을 선도하는 자유로 선용하는 자가 될 때에 참 자유를 누리는 자가 됩니다.
자유를 가졌다고 하여 악을 행하면 그 사람도 역시 감옥에 가두듯이 자유를 가진 자일수록 자유를 선하게 사용하는 자가 진리로 자유케 된 자입니다.
베드로 전서 2장 16절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얻은 자유를 잘못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리 되신 예수께서 자유케 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오히려 진리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진리를 거역하는 자일뿐이지 참 자유자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 죄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죄의 종이지 자유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진리에 속한 자유자가 되었으면 죄를 멀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자는 반드시 책임이 있고 의무가 있습니다. 종은 세금도 안내고, 전쟁에도 안 나가고, 교육도 받을 필요가 없지만, 자유자는 세금을 내고, 전쟁에도 나가고, 학교에 나가서 교육을 받을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참으로 자유자가 된 사람은 진리를 수호하고 지킬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였음을 알고 이 진리를 지키고 전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자유인입니다.
2. 병마에서 자유케 합니다.
마가복음 5장 3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건강하게 하여 주시며 병마에서 놓여서 자유함을, 건강함을 얻게 하여 주십니다.
이사야서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진리 되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이사여 53장에 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죄와 허물에서 자유케 하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우리에게 나음을 주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세 가지로 나누면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을 몰아내어 병에서 자유케 하여 주시고,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 되신 예수를 믿으면 그 믿음이 나를 구원하여 병에서 놓여서 건강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나 베드로나 사도 바울이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당시에 의학이 발달이 안 된 시대이지만 건강하게 살아간 것을 성경에서 보고 있습니다.
진리 되신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만나고 진리의 말씀을 소유한 사람은 병에서 놓임을 받아 건강하게 됩니다.
진리 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 앞에 나온 병자들을 예수님은 한 사람도 그냥 보내시지 않고 병자를 건강하게 하여 주셨습니다.
38년 동안 병마에 붙들려 있던 사람, 12년을 혈루병을 앓던 사람, 병으로 죽은 자, 문둥병 자, 실명자, 앉은뱅이 병자, 열병으로 앓고 있던 각색 병자들을 진리 되신 예수님께서 병마에서 놓임을 받는 자유를 주시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진리 되신 성령께서 동일한 사역으로 참 된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의지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치료함을 주시어 병마에서 자유케 하여 주십니다.
죄에서는 자유케 되었어도 병마에서는 자유함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진리는 죄에서 자유함을 줄뿐만 아니라, 진리는 병마에서도 놓이는 자유를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알고, 주장 할 때에 성령께서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질병에서의 자유를 주십니다.
진리 되신 하나님의 말씀보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더 중히 여기고 있는 사람은 병마에서 자유함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네 믿음대로 되라 하는 법으로 항상 내가 믿는 믿음을 따라서, 질병에서 놓이는 자유를 주십니다.
진리를 믿지 않고 의사의 말을 믿음으로 질병에서 놓임을 받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진리 되신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 진리의 성령의 권능을 믿고 행동 할 때에 진리가 나를 병마에서 자유케 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 할지어다”
진리 되신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에 병에서 놓여 건강의 자유를 누리는 진리의 능력을 믿고, 우리는 병마에서 자유를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가난에서 자유를 주십니다
고린도 후서 8장 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가난에서 자유케 하신다는 말은 부자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질의 지배를 받는 자리에서 물질을 지배하며 물질을 다스리며 사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돈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 1만 딸라가 있는 사람은 2만 딸라를 더 벌어야만 살 것 같고, 2만 딸라는 벌은 사람은 5만 딸라를 더 벌어야 살 것 같은 마음으로 항상 돈을 쫓으며, 돈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은 돈이 있는 사람이나 돈이 없는 사람들이나 모두 가난 속에 살고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보다 부자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더 죽겠다고 못살겠다고 야단입니다.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들은 대개 가난한 나라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보다도 돈이 있는 사람들이 더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진리가 가난에서 자유함을 주는 것에서 해방되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만족 할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가난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돈에 매여서, 물질의 종이 되어서 그 물질에 끌려 다니는 종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물질의 종으로 사는 자리에서 해방을 받아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 후서 3장 5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우리의 만족은 진리 되신 하나님을 알고 진리가 나를 만족하게 할 때에 이 가난에서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이 가난에서 해방이 되지 못한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십일조 헌금을 할 수 없습니다. 생활비가 모자라고 가난한데 어떻게 수입의 1/10을 떼어 낼 수가 있습니까?
수전노가 되어 물질에 따라 다니는 사람은 물질을 지배 할 줄 모르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진리 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과 말씀을 앎으로 가난에서 해방이 되어 항상 물질을 다스리고 만족함으로 살아가는 부요한 자, 진리로 인하여 가난에서 해방 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4. 진리가 마귀의 올무에서 해방케 합니다.
디모데 후서 2장 25절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진리를 모르는 모든 사람들은 지금 마귀의 올무에 걸려 있습니다.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세상 임금 마귀에게 사로 잡혀서 마귀의 종으로 살면서 생명 부지를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회개하고 진리의 하나님께로 돌아옴으로 마귀의 올무에서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진리의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고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 난 사람은 하나님께 사로잡혀 진리 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쫓으며 살아가는 자로 변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간음을 하다가 붙잡힌 여자를 놓아주시며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은 마귀의 올무에 걸리는 것이며, 죄를 범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난 사람, 자유자의 삶입니다.
낚시를 하다가 보면 올무에 걸렸어도 아픔을 이기고 이를 끊어 버리는 고기는 살아나지만,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끌려오는 고기는 죽고마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듯, 올무를 끊는다는 것은 아픔이 따라오지만 우리가 참 자유를 얻는 자가 되기 위하여 회개의 아픔을 견디고,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끊어 버리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신 주님은 죄를 끊어 버리는 결단을 내리는 회개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요 한 1서 3장 8절 - 10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죄를 멀리 하고 의를 행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될 때에 마귀의 올무에서 해방이 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죄를 지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떠나서 사는 사람은 아직 마귀의 올무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난 진리에 속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과 의와 사랑을 쫓아 살아가는 자유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요한 1서 3장 14절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정리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를 안다는 것은 머리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하는 것을 성경은 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가 복음 1장에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할 때에 내가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하고 반문하였습니다.
마리아가 남자가 어떻게 생겼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 아니고, 남자와 한번도 함께 자지를 않았고, 성적 경험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안다는 것은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알고 성령을 알고, 하나님 말씀을 아는 것은 아무런 진리를 아는 일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진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성령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육신으로 나타나는 기적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진리를 아는 사람이요, 이러한 사람이 자유함을 얻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 할 때에 중생, 거듭난다는 말로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5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진리를 알지 못하면 자유하지 못하고 영원한 형벌 속에 들어갑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를 지키며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알고, 이 진리를 앎으로, 경험함으로, 믿음으로 우리는 자유케 됩니다.
죄에서 자유함을 얻고, 가난에서 자유함을 얻고, 질병에서 자유함을 얻고, 마귀의 올무에서 자유함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고 진리로 인한 자유를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삼위 일체 하나님이 하나이시고 말씀이 하나이니 이와 같은 진리는 다시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려면, 회개를 하고 주를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진리를 경험하게 하고, 이 진리를 경험한 자만이 죄에서,, 질병에서, 가난에서, 마귀의 올무에서 자유함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자유를 누리며 자유자로,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맘껏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며 진리를 전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다윗이 그의 '목자의 노래'인 시편 23편을 지은지 1000년쯤 지난 후에
예수님이 확신에 차서 차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내가 내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의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1-15)
이분이 바로 "양의 큰 목자"(히 13:20)이신 주 예수님입니다.
우리를 "목자 잃은 양들"로 보신 주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눅 19:10) 오셨습니다.
주님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산에 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한 개인이 소중하다는 사실과
어느 한 사람도 잃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마 18:12-14)을
영원히 확고하게 세우셨습니다.
에프 비 마이어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의 생명의 피로 우리의 몸값을 치르면서도
아까와 하지 않는 순수하고 관대한 사랑으로 뛰는 목자의 심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은 온 양떼를 지키면서 추운 산속에서 길 잃은
불쌍한 한 마리의 양도 놓치지 않는 목자의 눈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저버리지도,
우리를 쓸쓸히 버려두거나 떠나버리지도 않는
충실한 목자의 마음도 가지고 계십니다."
선한 목자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희생해야한다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목자가 자신의 어린양을 신전에 데려와 자신의 온몸을 양의 머리에 의지하고
죄를 고백하고는 자신의 생명을 위해 그 어린양을 희생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목자가 그의 어린양을 위해 목숨을 버립니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예수님은 살인, 간음, 도적질 등 명백한 죄악뿐 아니라
이기주의와 자만심 같은 보이지 않는 죄 등,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악을 떠 맡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죄를 위한 마지막 치유책이었습니다.
우리의 목자 예수님!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스스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시고 그것을 고쳐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후에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일은 하나님이
용서하심으로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 속으로 들어가는 것밖에 없습니다.그리고 이미 들어와 있는 이들은 더 깊이 그 용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목자 되시는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 삶의 가장 작은 소리라도 듣고 계십니다.
그분은 실날같은 흐느낌도 들으십니다.
아무 소리를 못 듣는다 하셔도 포기하거나 가버리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방황하게 놓아두시고
지치고 절망하여 주님께 다시 되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올 때
주님은 우리를 맞아주시려 그곳에 계십니다.
그분은 줄곧 그곳에 계셨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 145:18)
그러나 당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왜 나를 원하시는지? 주님은 내 죄도, 나의 방황도,
세상에 굴복하는 오래된 내 습관도 다 아시는데, 나는 별로 선량하지도 않고,
내 죄에 대해 그렇게 뉘우치지도 않는데,
게다가 죄를 안 짓는다는 것도 내게 있어서는 불가능한 일이야."
우리의 이 엉터리 같은 점을 하나님께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해도 결코 놀라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한번만 잠깐 봐도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될 수 있었는지,
우리의 죄가 없었다면 그것이 어떻게 되었을지 모두 다 아십니다.
우리 마음의 어두운 구석들과 틈을 보시고,
거기에 있는 우리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면 보실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우러나올 뿐입니다.
하나님께는 사랑보다 더 강한 동기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그것 외에는 어느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요일 4:8)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이제 남은 일은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
이 사실보다 더 심오한 교훈은 없습니다.
목자라는 단어는 포근함과 안도감, 또는 예비함의 뜻을 동반하지만,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라고 내가 말할 수 없다면 그 말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나의"라는 이 한 마디를 하느냐 못하느냐가
만들어내는 차이는 정말 엄청난 것입니다.
그 말은 곧 내가 전부인 양,
하나님의 모든 돌보심과 모든 시간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무리의 하나일지언정 나 하나 뿐인 것입니다.
"주님은 목자"라는 말과 "주님은 나의 목자"라는 말은 아주 다른 말입니다.
마틴 루터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개인적으로 부를 수 있는가에 우리의 믿음이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입니다.
§ RBC Ministirs "주님의 나의 목자"에서 발췌 §
I can do it! Because GOD is with me!
"나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해 보세요!
그리하면 놀라운 주님의 축복과 은혜가 넘치는 기적이
여러분을 삶의 곳곳에 펼쳐지실것이랍니다.
이 모든 기도 사랑하옵고 감사드리는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
I can do it! Because GOD is with me!
"나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